
도서관 가면 만화 코너에서 안 움직이는 아이
도서관에 가면 아이가 곧장 만화책 코너로 직행한다. 글 위주의 동화책 코너 쪽으로는 눈길도 안 준다. 처음엔 "이러다 글 읽는 힘이 안 늘겠다" 싶어서 은근히 다른 책을 권해봤는데, 그때마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대출 카드를 보면 늘 만화책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이대로 괜찮은 건가 하는 걱정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그나마 보기좋고 이야기의 흐름이 있는 만화책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림체는 자극적이고 스토리 전개도 없이 짧은 효과음 몇개로 대여섯 페이지는 넘어가는 책을 읽을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만화책을 못 읽게 하려던 시기
한동안은 "만화책은 이제 그만 보고 이 책도 한번 읽어볼까?"라며 은근히 유도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아이는 만화책을 더 애타게 찾았다. 오히려 만화책이 '특별히 좋은 것', '아껴서 봐야 하는 것'처럼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빌려올 때마다 한 권만 고르게 제한을 뒀는데, 그럴수록 다음 방문 때 더 필사적으로 만화 코너로 달려가는 걸 보고 이 방식이 역효과라는 걸 느꼈다.
'글밥이 있는 책을 읽어야 만화책을 읽게 해준다'라는 전제는 일종의 보상 심리와도 같아서 오히려 글밥 책 다 읽었는데 왜 만화책 못읽게 하냐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조건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들이 원한 반응은 아니었다.
만화책도 '읽기'라는 걸 인정하기로
알아보니 만화책도 그림과 글을 함께 해석하는 엄연한 읽기 활동이라고 한다. 오히려 그림 단서로 맥락을 유추하는 능력이나, 짧은 대사 안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은 만화가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뒤로는 "만화책은 진짜 책이 아니다"라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때 만화책으로 처음 독서에 재미를 붙였던 기억이 있는데, 정작 아이한테는 그 경로를 막고 있었던 셈이다. 나도 사실 한국사의 커다란 틀은 만화로 이루어진 책으로 접했었다.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시대를 거스르는 명작은 만화책임에도 지금 내가 읽어도 재미 있기 떄문이다.
만화책 종류를 다양하게 넓혀줬다
대신 만화책 안에서도 종류를 넓혀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동안은 캐릭터 위주의 짧은 개그 만화만 봤다면, 역사나 과학을 다루는 학습만화, 긴 호흡의 스토리만화도 같이 골라줬다. 좋아하는 형식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접하는 내용의 폭만 넓혀준 셈이다.
찾아보면 만화 명작 책들도 충분히 우리 주변에 있었다. 어떤 책을 추천해 줄지는 개인마다 다르기 떄문에 본 글에서 추천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해외에서 발간되어진 만화책 중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스토리 전개와 성인인 내가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일절 폭력적이지 않은 책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일반 책은 자연스럽게 곁들였다
일반 책을 억지로 읽히지는 않되, 만화책 옆에 관련 주제의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슬쩍 같이 놓아뒀다. 공룡 만화를 좋아하면 공룡 그림책을, 우주 만화를 좋아하면 우주 관련 동화책을 옆에 뒀다. 관심사가 겹치니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날이 늘었다. 손 닿는 곳에 책이 있으니 본인도 모르게 글밥이 있는 책도 접하기 시작했다. 만화책 버젼의 책을 읽고있다면 그와 관련있는 글밥 있는 책을 구해서 아이 근처에 준비해 줬던 것이다.
책없으면 불안해 하는 아이
여전히 만화책을 제일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글밥있는 책을 더 선호한다. 돌아보면 "만화책 대신 진짜 책을 읽혀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던 것 같다. 무엇을 읽든 읽는 행위 자체를 즐기게 해주는 게 먼저였고, 관심사를 존중해주니 오히려 읽는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돌아보면 만화책을 은근히 깎아내리던 내 태도가 오히려 아이한테 "내가 좋아하는 걸 아빠는 안 좋아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줬을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은 만화책을 읽어도 "이 장면 재밌다"며 같이 웃어주고, 궁금한 내용을 물어보기도 한다. 무엇을 읽는지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같이 즐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번에 배웠다.

원작 도서를 영화화 해서 엄청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부터, 반지의 제왕까지. 아직 우리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영화속 잔인한 장면이나 섬광 같은 부분을 견딜수 있을 지 모르겠어서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해리포터'라는 말은 들어봤다고 하니, 도서관에 가서 원서를 구해주고 그 책을 한권 다 읽을 때마다 영화를 한편씩 같이 볼 생각이다. 원작의 깊이를 영상에 다 담을수는 없지만 그 차이는 책을 읽은 사람만 알 수 있다는 일종의 '우월감'을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