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걸 의심하기로 결심한 이유
앞서 다룬 세 철학자가 고대 그리스 사람이였다면, 데카르트는 그보다 약 2000년 뒤인 17세기 사람이다. 그는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철학을 하는 방식 자체를 바꿨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오래된 믿음이 흔들리던 때였다. 과학이 날로 발전하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하나씩 뚤집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참이라고 여겨온 것 중에 잘못된 게 얼마나 많을까. 확실한 지식을 쌓으려면, 맨 먼저 기존의 믿음을 전부 한번씩 의심해봐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이건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걸 포기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확실을 찾기 위해 의심이라는 도구를 일부러 써본 것이다. 무너뜨리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단단히 쌓기 위한 의심이었던 셌이다.
방법적 회의 — 일부러 의심해보는 전략
데카르트의 의심은 체계적이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는 것은 일단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이를 방법적 회의라 부른다. 확실한 걸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부러 극단적으로 의심해본 것이다.
먼저 감각을 의심했다. 우리 눈과 귀는 종종 속는다. 멀리 있는 물체가 작게 보이고, 물에 잠긴 막대기는 휘어져 보인다. 감각이 가끔 속인다면, 감각에서 온 지식은 확실할 수 없다. 그다음에는 현실과 꿈을 구별할 수 있는지를 의심했다.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게 꿈인 줄 모르고 생생하게 참으로 느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감각도 거짓일 수 있고, 현실과 꿈도 구별할 수 없다면 도대체 확실한 게 남아있긴 한가. 데카르트는 극단의 가정까지 밀고 간다. 어떤 교활한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게 허구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 한 가지가 남는다. 악마가 나를 속이려면, 속임을 당할 '나'가 일단 존재해야 한다. 즉 의심하고 있는 나, 생각하고 있는 나만큼은 절대 의심할 수 없다. 모든 걸 의심해도, 의심하는 행위 그 자체는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한 문장이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됐다. 데카르트는 모든 걸 의심한 끝에,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단단한 바닥 하나를 찾아냈다. 흥미로운 건, 그 확실성의 근거가 바깥 세상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라는 점이다. 확실함의 출발이 내 안에 있다는 이 발상이, 이후 철학의 방향을 크게 바꿉다.
심신 이원론 — 마음과 몸은 따로인가
데카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의심해도 남는 게 생각하는 나라면, 나의 본질은 몸이 아니라 생각하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았다. 이걸 심신 이원론이라 부른다.
그의 구분은 이렇다. 육체는 공간을 차지하고 눈에 보이며 기계처럼 작동한다. 반면 정신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생각하고 의심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존재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다만 이 이론은 곧 큰 숙제를 남겨놓았다. 마음과 몸이 그렇게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둘은 대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내가 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손이 움직이는데, 비물질적인 정신이 어떻게 물질적인 몸을 움직일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철학과 뇌과학이 씨름하는 난제로 남아있다.
데카르트가 지금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데카르트를 앞선 세 철학자와 나란히 놓으면 큰 흐름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안다고 믿는 걸 의심하라 했고, 데카르트는 아예 모든 걸 의심해보라고 했다. 둘 다 '당연함을 의심하라'는 점에서 닿아있지만, 데카르트는 그 의심을 극단까지 밀고 가 오히려 확실한 토대를 찾아냈다.
그가 지금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는가." 정보가 넘치는 요즘, 우리는 수많은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가 직접 검증한 적이 있던가, 아니면 남이 말해서 그저 믿고 있는 건가. 데카르트라면 한번씩 의심해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걸 의심하며 살 수는 없다. 그러면 일상이 마비될 것이다. 다만 데카르트의 태도가 지금도 유효한 건,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을 구별하려는 그 태도 자체다. 내가 당연히 안다고 여긴 것이 정말 확실한가. 그 질문을 한 번 멈춰 던지는 것, 그게 데카르트가 열어준 근대적 사고의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