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 외우기

구구단을 외우게 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딸아이가 네다섯 살쯤 됐을 때,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숫자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줬다. 목적은 구구단 암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숫자라는 게 그냥 시험에 나오는 딱딱한 기호가 아니라, 친근하고 재밌는 존재라는 느낌을 먼저 심어주고 싶었다. 처음엔 그냥 잠들기 전 심심풀이로 시작한 거였는데, 나중에는 매일 밤 빠뜨릴 수 없는 루틴이 됐다.
1부터 9까지, 각자 이름을 지어줬다
숫자 하나하나에 캐릭터 이름을 붙였다. 1은 워니, 2는 두식이, 3은 쓰쓰, 4는 포니, 이런 식으로 9까지 각자 개성 있는 이름과 성격을 만들어줬다. 딸아이도 이 캐릭터들을 진짜 친구처럼 좋아했다. "오늘은 두식이 나와?"라며 먼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캐릭터마다 성격도 다르게 만들었는데, 워니는 겁이 많고 포니는 용감한 식으로 대비를 줘서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했다.
더하기 곱하기 나누기는 이야기 속 아이템이었다
이야기 구조는 매번 비슷했다. 워니부터 시작해서 캐릭터들이 모험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더하기', '곱하기', '나누기'라는 신비한 아이템을 하나씩 얻었다. 이 아이템을 써서 문제를 풀어야 다음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두식이가 나오는 밤에는 "두식이 둘이 모이면 몇이 될까?"처럼 자연스럽게 곱셈 개념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다. 딸아이는 그게 수학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냥 다음 이야기를 보기 위해 필요한 퀴즈 정도로 받아들였다.
매일 밤 조금씩, 10을 구하러 갔다
이렇게 매일 밤 캐릭터를 하나씩 만나며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마지막엔 9명의 캐릭터가 힘을 합쳐 어딘가에 갇혀 있던 10을 구해내는 결말로 마무리했다. 몇 주에 걸쳐 이어진 이 여정이 끝났을 때, 딸아이는 마치 긴 모험 소설을 완독한 것처럼 뿌듯해했다.
결과적으로 구구단을 자연스럽게 외웠다
신기하게도 이 과정을 거치고 나니, 정작 초등학교에 들어가 구구단을 배울 때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숫자와 연산 기호에 이미 친숙했기 때문인지, 다른 아이들이 외우기 힘들어하는 부분에서도 곧잘 따라갔다. 무엇보다 숫자 자체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재밌는 걸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그냥 매일 밤 이야기 하나 지어내는 것에 불과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몇 달간의 잠자리 이야기가 숫자에 대한 태도 자체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억지로 암기시키기보다, 숫자를 친구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부터 시작한 게 결국 더 오래가는 방법이었다.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날은 소재가 안 떠올라서 같은 캐릭터를 두 번 다시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딸아이는 그런 반복조차 좋아했다. 완벽한 스토리가 아니어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그 루틴 자체가 아이한테는 안정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줬던 것 같다.